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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천주교, 가톨릭 세례명 축일]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 학자 -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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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8/Saint_Petrus_Canisius.jpg

  

네덜란드 동부 네이메겐(Nijmegen)에서 9차례나 선출된 시장의 아들로 태어난 성 베드로 카니스(애칭)는 법률가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쾰른(Koln) 대학교로 갔으나, 그 대학의 저명한 교수이며 예수회원이던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 8 2) 신부의 영향을 받아 신학으로 전향하고, 1543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성 베드로 가니시오(Petrus Canisius, 또는 베드로 카니시우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산을 주고난 후 1546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곧 그의 설교는 유명하게 되었다. 그는 트렌토(Trento) 공의회의 두 회기에 참석하였고, 성 이냐시오가 시칠리아(Sicilia)의 메시나(Messina)에 설립한 예수회의 첫 번째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바이에른(Bayern)의 빌리암 4세 공작이 그곳의 프로테스탄트들을 물리치고 가톨릭을 재건하기 위하여 그를 요청하므로, 그는 1549년에 인골슈타트로 갔다. 그는 이와 비슷한 일을 빈(Wien)에서도 하였는데, 그의 명성은 이 지역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성 가니시오는 프로테스탄트를 대항하여 가톨릭의 신앙을 옹호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으므로, 이제 그는 같은 주제에 대하여 저술하기 시작하여 자신의 교리서 첫판을 발간하자 큰 선풍을 일으켰고, 즉시 1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또 1556년에 프라하(Prague)로 파견되어 그곳에 새로 짓는 대학교를 위하여 일하는 동안에, 남부 독일과 보헤미아(Bohemia)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새 관구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독일 전역을 순회하면서 강의하고 설교하였고, 프로테스탄트를 반박하였으며, 여러 개의 대학을 설립하고, 그가 설교하는 도시의 가톨릭을 부흥시켰으며, 폴란드에 예수회를 널리 보급한 장본인이었다. 1559년부터 1565년 사이에 그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 있었다. 그는 아주 정열적인 사람이었으니, 30년 동안 도보로 혹은 말을 타고 2만 마일을 여행하면서 선교한 사람이다. 후일 그는 딜링엔(Dillingen), 인스브루크(Innsbruck)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프리부르(Fribourg)에서 교육에 전념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현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조차 '고상한 예수회원, 결점 없는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평할 만큼, 트렌토 공의회를 연이어 일어난 가톨릭 재건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그 당시의 논객들 가운데서 가장 예의바르고 올바르며 예리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펜과 신문의 영향을 감지하였으므로, 모든 인쇄업자와 출판사에 용기를 주었다. 그는 또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Cyrillus)와 성 대 레오(Leo)의 전집을 편집하였고, 성 예로니모(Hieronymus)의 편지를 비롯하여 순교학, 성무일도 개정 그리고 가톨릭 공과 등 수많은 저서를 내었다. 흔히들 그를 '독일의 두 번째 사도'로 부른다. 그는 1864년 교황 비오 9(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베드로 가니시오(독일어: Petrus Canisius, 네덜란드어: Pieter Kanijs, 152158- 15971221)는 독일의 그리스도교 신학자이다.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스위스 등에 퍼져있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항한 것으로 유명한 예수회 사제이다. 특히 종교분열로 인하여 무너진 독일 가톨릭교회를 재건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므로 흔히 그를 독일의 두 번째 사도로 부른다.

베드로 가니시오는 1864년 교황 복자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됨과 동시에 교회학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축일은 1221일이다.

 

생애

베드로 가니시오는 겔더스 공국(오늘날의 네덜란드 영토이며, 1549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속령이였음)의 네이메헌 출신이다. 네이메헌에서 아홉 차례나 시장으로 선출된 전력이 있으며, 부유한 토지의 소유자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주로 말미암아 학문 면에 탁월한 성적을 나타냈다. 신앙심이 별로 깊지 않았던 그는 처음에는 법률가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쾰른 대학교에 갔으나,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첫 제자인 복자 베드로 파브르를 만나고 점차 그에게 감화를 받아 자기 일생의 사명이 이 방면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신학으로 전향하여 예수회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1543년 마침내 서른 살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받으면서 최초의 네덜란드인 예수회 사제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서품받은 날은 그의 생일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소명을 통해 당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자금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도 그는 독일에 여러 개의 예수회 대학을 설립하고, 대학 강단을 순회하면서 강의하고 설교하였다. 그는 도보로 혹은 말을 타고 20,000마일을 여행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프로테스탄트를 반박하고 자신이 설교한 도시의 가톨릭 신앙을 부흥시킴으로써 흔히들 그를 독일의 두 번째 사도로 부른다.

베드로 가니시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페르디난트 황제에게 군사 지원을 얻는 대가로 프로테스탄트교도들에게 더 많은 권리를 양보할 것은 장차 큰 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베드로 가니시오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프로테스탄트 신봉자임을 천명한 페르디난트 황제의 아들 막시밀리안에게서 실제로 위험을 감지하고, 페르디난트 황제를 찾아가 만약 막시밀리안이 가톨릭 신앙을 저버린다면 그에 대한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을 것을 중용하였다.

베드로 가니시오는 영향력 있는 교사이자 설교가였다. 특히 그는 독일어권 국가들의 사람들을 위해 가톨릭교회의 기본 교리를 독일어로 알기 쉽게 풀이해 쓴 독일어 교리문답서를 집필하였다. 그는 빈 교구장 주교직을 제의받았지만,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1554년부터 1555년까지 빈 교구의 관리자와 1559년부터 1568년까지 아우크스부르크 주교좌 성당의 설교가를 짧은 기간 동안 맡으면서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베드로 가니시오의 강론은 설득력이 대단하였기 때문에 이를 들은 수백 명의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 가톨릭 신앙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1557년에 그는 보름스 대화에 주요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다.

베드로 가니시오가 1590년 독일을 떠날 무렵, 예수회는 독일에서 거의 빈손으로 시작했다가 가톨릭 개혁의 강력한 도구로 크게 성장하였다. 베드로 가니시오는 칼뱅파가 득세한 스위스의 프리부르에서 선교사로서 남은 여생을 보내면서 수년 후에는 그곳 시민의 대부분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프리부르에 성 미카엘 학교라는 이름의 예수회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성 미카엘 소학교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장래의 대학 진학을 대비하기 위한 교육을 목적으로 세운 학교로, 오늘날까지 주 행정부 관리 아래 남녀 공룡 대학교육 준비기관으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베드로 가니시오의 사목 전략

종교분열 시대를 살았던 베드로 가니시오는 새로이 출현한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에 맞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 견고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그가 이룩한 가장 큰 공헌은 라틴어와 독일어로 집필하여 출간한 세 권의 교리문답서인데, 이는 가톨릭 지역 내에 광범위하게 퍼져 대중으로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는 독일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싸우는 한편 로마에 대해서도 만일 로마에서 독일인들을 정당하게 대우해준다면, 독일인들은 로마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할 것이다.”라면서 독일에 대해 보다 융통성 있게 대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출처 : 위티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B%93%9C%EB%A1%9C_%EA%B0%80%EB%8B%88%EC%8B%9C%EC%98%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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