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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천주교, 가톨릭 세례명 축일]<기념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 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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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98%A4%EB%A1%9C_%EB%AF%B8%ED%82%A4#/media/File:Bamberg_St_Martin_Figur_Paul_Miki.jpg

출처 : 가톨릭 굿뉴스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 三木)는 지금의 오사카 인근 도쿠시마(德島)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고, 10여 세 되었을 무렵 아즈치야마(安土山)의 예수회 신학교에 제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 22세 때인 1585년 졸업과 동시에 수사가 되었다. 수사가 된 성 바오로 미키는 타고난 성품과 열정으로 전교 활동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후에 주교 마르티네즈(Martinez Pedro)를 따라 오사카(大阪)에서 활동하던 중 예수회 신부인 오르간티노(Organtino Gnecchi-Soldi)의 눈에 띄어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함께 활동했다. 이후 그는 불교 승려들과 많은 토론을 벌였고, 자신이 저술한 교리서들을 통해 불교 신자들을 깨우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 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적이 있었지만, 1590년 순찰사 발리냐노(Valignano Alessandro)가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히데요시를 방문한 뒤에는 금교의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1596년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금교를 무릅쓰고 교토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히데요시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그 결과 1597년 초에는 교토와 오사카 일대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작은 형제회 수사 6명, 예수회 수사 3명과 일본인 신자 15명 등 24명이었다. 성 바오로 미키는 이때 오사카에 있다가 뜻하지 않게 체포되어 1597년 1월 1일 교토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어 그는 1월 3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오사카를 거쳐 1월 9일에는 나가사키로 출발하였고, 27일 동안 혹한 속을 걸어서 2월 5일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이들 일행은 도중에 일본인 신자 2명이 자진하여 체포됨으로써 모두 26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날 저녁, 성 바오로 미키는 동료들과 함께 나가사키(長崎)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西坂)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순교 직전에 그는 당당한 얼굴로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으며,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바오로 미키(일본어: パウロ三木 ぱうろみき, 1564년? - 1597년 2월 5일)는 일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천주교 예수회 수사이다. 가톨릭교회의 성인으로 일본 26위 성인의 한 사람으로 순교하였다.
바오로 미키는 셋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미키 한다유(三木半太夫)는 미요시씨를 따르는 무장이었으나, 1568년 상경을 완수한 오다 노부나가의 수행원으로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이윽고 미키 한다유가 천주교에 이끌려 세례를 받으면서 어린 바오로 미키도 세례를 받았는데, 이때 받은 세례명이 「바오로」이다. 아즈치에 최초의 세미나리요(seminariyo, 소신학교)가 세워지면서, 바오로 미키는 제 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 예수회원들에게 교육을 받으며 폭넓은 학업을 쌓았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바오로 미키는 예수회에 입회하여 전교 활동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오사카에서 잡혀서 쿄토로 압송된 뒤, 나가사키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당시 부교였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바오로 미키를 비롯한 예수회 관계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바오로 미키는 다른 25명의 사람들과 함께 나가사키로 보내져 1597년 2월 5일, 같은 곳에서 처형당하였다.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에 따르면, 바오로 미키는 십자가 위에서 몰려있는 군중을 향해 「나는 판결문에 나와있는 것처럼 필리핀인이 아니라 당당한 일본인입니다. 나는 천주교를 믿었다는 것만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이 이유 때문에 나는 생명을 바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처형을 명령한 사람(도요토미 히데요시)과 처형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바오로 미키는 1627년 2월 14일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98%A4%EB%A1%9C_%EB%AF%B8%ED%82%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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