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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천주교, 가톨릭 세례명 축일]<기념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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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 드 살©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출처: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황홀경의 성 프란치스코 드 살©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출처: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Franciscus de Sales,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는 1567년 8월 21일 이탈리아의 독립 공국인 사보이아(Savoia)의 토렌스(Thorens)에 있는 가문의 성(城)인 샤토 드 살(Chateau de Sales)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Paris) 인근 안시(Annecy) 대학과 클레르몽(Clermont)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이탈리아 파도바(Padova) 대학교에서는 교회법과 일반법을 전공하여 불과 24세의 약관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가족들의 반대는 물론 법률가 자격 제의와 상원 의원 제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도생활을 위하여 화려한 세속의 일과 전망을 모두 포기하고 1593년 12월 18일 안시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1594년 샤블레(Chablais) 지방의 선교사를 자원하여 5년 동안 활동하였는데, 그곳은 칼뱅주의자들이 약 50년간 가톨릭 신앙을 금지하고 프로테스탄트를 강요하던 지역으로 사보이아 공국이 되찾은 지 얼마 안 되는 선교 지역이었다. 암살자와 칼뱅교도들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 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99년 5월 22일 그는 스위스 제네바 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다가, 1602년에 선임 교구장이 사망하자 그를 계승하여 교구장 주교가 되었다.

그는 곧 종교개혁자에 대항하는 지도자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의 지혜와 지식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뛰어난 고해신부이자 설교가인 그는 해박한 신학지식과 이해심으로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았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예비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교구를 훌륭하게 다스렸다. 1604년 그는 부르고뉴(Bourgogne)의 수도인 디종(Dijon)에서 유명한 강연을 하였는데, 그때 네 명의 어린 자녀들을 둔 젊은 남작 미망인인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oanna Francisca de Chantal, 8월 12일)을 처음 만나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교회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영적인 우정으로 자라났다. 그 후 1607년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과 함께 기존 수도회의 육체적 엄격함을 견디기 어려운 젊은 여성들이나 미망인들을 위한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프랑스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리옹(Lyon)에 있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원의 작은 방에서 머물렀는데, 이때 뇌일혈을 일으켜 병자성사와 고해성사를 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예수, 내 하느님 나의 전부여!"라고 기도한 후 그 다음날인 1622년 12월 28일 숨을 거두었다. 그의 저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신심생활 입문”(1609년)과 “신애론”(1616년)을 들 수 있다. 그는 1662년 1월 8일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되었는데, 이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한 첫 번째 공식 시복식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는 1665년 11월 19일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고, 1877년 11월 16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으며, 1923년에는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작가와 언론인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라틴어: Sanctus Franciscus Salesius, 프랑스어: Saint François de Sales, 1567821- 16221228)는 제네바의 주교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신심 생활 입문, 하느님을 찾는 이들에게등 영성 지도와 형성을 주제로 한 책을 저술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모범으로서 성모 성심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는 글을 남겼으며, 이는 요한 에우데스로 하여금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을 발전시키는 데 영향을 끼쳤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1567821일 사보이의 귀족 집안 출신으로 뽀데레드토렌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수아 드 보이시이며, 어머니는 프랑수아즈 드 시오느즈이다. 6남매 가운데 장남이었던 프란치스코는 최고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하겠다는 부친의 열망에 힘입어 특별히 라로슈쉬르포롱과 안시 인근에서 특별 수업을 받았다. 그의 영성과 지식은 예수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1583년 그는 파리의 클레르몽 대학교에 들어갔다. 1년 후 프란치스코는 운명에 대한 신학 토론에 참석한 후에 자신이 죽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 공포심에 빠지게 되었다. 158612월 그의 절망과 공포심은 극에 달해 결국 몸살이 나서 몸져눕게 되었다. 15871월 프란치스코는 두려움을 가득 안고 프랑스 남부에 있는 생테티엔드그레 성당을 방문하였다. 이로써 그의 마음은 평온을 되찾고 자신의 일생을 하느님에게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어떠한 길을 걷게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듯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었다.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충실한 헌신은 그의 불안감을 떨쳐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생활과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톨릭 영성에서 그의 가르침은 훗날 그가 쓰게 된 저서인 신심 생활 입문등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1588년 프란치스코는 파리 대학교에서 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교로 편입하여 법률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사제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지적이고 준수한 용모를 갖추었던 프란치스코는 돈이나 현세의 것을 멀리하고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며 살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 여러 가지 사건을 경험하였다. 한 번은 그가 말을 타고 가는 동안에 허리에 찬 칼이 땅에 떨어졌는데, 그 칼이 다른 칼과 교차되면서 십자가 형태를 이루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징조를 겪으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교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고 이타적인 사랑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592년 프란치스코는 법학과 신학 분야에서 모두 박사학위를 받고 공부를 무사히 끝마쳤다. 그는 성모 마리아 순례지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로레토를 순례하기 전에 먼저 집으로 갔다. 집에서 그의 부친은 이미 아들을 위해 샹베리 시의회 의원직을 비롯하여 여러 중요한 요직을 미리 얻어놓았다. 프란치스코의 부친은 자기 아들이 군인이나 정치인이 되기보다는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였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부친이 미리 정해준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하는 것을 거부하고 하느님과 함께 길을 걷는 인생을 살기로 선택하였다. 당시 제네바 주교의 중재로 프란치스코는 결국 1593년 사제로 서품됨과 동시에 제네바 주교좌 성당 참사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517년 종교개혁이 발발한 이래, 개신교에 속하는 장로교가 제네바를 장악하면서 제네바 교구장 주교들은 쫓겨나 임시로 프랑스 사보이의 안시로 거처를 옮겨 지내왔다. 프란치스코는 선교사로서 사보이의 개신교 신도들에게 전교 활동에 전념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사람이 본래의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로마와 파리를 부지런히 오가며 교황 클레멘스 8세와 프랑스 국왕 앙리 4세 사이에 동맹을 체결하도록 주선하였다.

1602년 제네바 교구장 주교가 죽자 프란치스코가 그 뒤를 이어 제노바 대교구의 교구장에 착좌하였다. 주교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대중의 마음을 이끌어내고 경청에 집중시키는데 탁월한 강론 능력을 갖추었으면서 엄격한 생활을 고수하는 성직자로서 대중으로부터 명성을 얻었다. 특히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이면서 놀라울 정도로 깊은 온화함과 이해심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그의 우수한 자질은 그의 저서에서 드러나는데, 가장 유명한 책이 신심 생활 입문(Introduction à la vie dévote)으로서 특별히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다. 신심생활 입문은 현재 준주성범과 더불어 가톨릭 신자들에게 양대 권장도서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는 높은 영성 생활 지도를 담은 서간인 신애론(神愛論)을 쓰기도 하였다.

161066일에는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과 더불어 여성 봉쇄 수녀회인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방문 수녀회)를 안시에 설립하였다.

16221228일 프란치스코는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수행원들과 함께 여행을 하다가 프랑스 리옹에서 선종하였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1661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그로부터 3년 후에 시성되었다. 1877년에는 교황 복자 비오 9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유해는 프랑스 안시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방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순례지에서는 여러 가지 기적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그의 성유물 가운데 하나인 심장은 원래 리용에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혁명을 피해 베네치아로 옮겨와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축일을 그의 시신이 안시에 안장된 124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9E%80%EC%B9%98%EC%8A%A4%EC%BD%94_%EC%82%B4%EB%A0%88%EC%8B%9C%EC%98%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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