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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천주교, 가톨릭 세례명 축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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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가톨릭 굿뉴스

 

티에폴로의 영광을 받는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Aloysius Gonzaga)

출처 : 가톨릭 굿뉴스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또는 알로이시우스)는 1568년 3월 9일 이탈리아 북부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의 후작 페란테(Ferrante Gonzaga)와 마르타 타나 산테나(Marta Tana Santena)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였으나, 다소 야만적이고 부도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앙심 깊은 어머니는 깊은 사랑으로 알로이시오를 키우려고 노력하였다. 알로이시오의 아버지는 그가 군인이 되기를 원하였으나, 그는 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가정 교사였던 피에르프란체스코(Pierfrancesco del Turco)는 알로이시오의 영혼과 정신을 길러 주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577년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Felipe II, 1556-1598)의 부름을 받은 아버지는, 알로이시오를 피렌체(Firenze)의 대공 프란치스코 데 메디치(Francesco de Medici) 궁의 시동(侍童)으로 보냈다. 2년 후인 1579년에 알로이시오와 그의 동생 로돌포(Rodolfo)를 브레시아(Brescia) 지방 만토바(Mantova)로 옮겼다. 1581년 알로이시오의 가족은 마드리드(Madrid)로 갔고, 알로이시오는 펠리페 2세 궁정에서 왕자 돈 디에고(Don Diego)의 시동으로 지내면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왕자가 사망하자 1583년 8월 15일 알로이시오는 예수회에 입회할 것을 결심하였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완강히 반대하며, 일단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원하는 대로 하라고 아들을 설득하였다. 이탈리아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온갖 방법으로 알로이시오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애를 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1585년 11월 2일 로마(Roma)에 있는 예수회에 입회한 성 알로이시오는 밀라노(Milano)의 예수회 분원에서 몇 달을 지낸 후 만토바에서 수련을 받았다. 이듬해 2월 15일 아버지가 사망하여 잠시 집에 들러 모든 일을 정리하고 돌아온 후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는 나폴리(Napoli)에 머물면서 형이상학을 공부하였고, 로마 대학에서 철학을 배웠다. 1587년 11월 25일 첫 서원을 한 뒤 곧바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를 가르치던 교수들 중에는 당시의 유명한 학자 바스케스(G. Vazquez, 1549-1604)가 있었으며, 훗날 성인이 된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 9월 17일)가 알로이시오의 영성지도 신부였다.
성 알로이시오가 신학을 공부한 지 4년째 되던 1590년 도시 전체에는 흑사병이 퍼졌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병자들을 돌보던 알로이시오는 이듬해 3월 초 이 병에 전염되어 6월 21일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성 이냐시오(Ignatius)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성 알로이시오는 신중하고 분별력 있게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하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긍정적이고 관찰력이 탁월하였던 알로이시오는 철학과 신학의 전 과목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에게도 인정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어려서부터 정결을 지키며 살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고, 어떠한 반대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특별히 정결에 대한 은사를 받은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또한 그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악습들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자존심과 이기심을 이기기 위한 수련을 끊임없이 하였다.
성 알로이시오는 1621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26년 12월 31일 교황 베네딕토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 후 3년 후 알로이시오 성인은 젊은이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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