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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천주교, 가톨릭 세례명 축일]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 -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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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보르자_by Alonso Cano_in the Museum of Fine Arts of Seville in Spain.jpg

출처 : 가톨릭 굿뉴스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cus Borgia)는 간디아(Gandia)의 세 번째 공작인 후안 보르자(Juan Borgia)와 아라곤(Aragun)의 알론소(Alonso)의 딸인 후아나(Juana)의 14명의 자녀 중 맏이로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 근교 간디아에서 태어났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를 증조부로, 가톨릭 왕으로 불리며 에스파냐 왕국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Ferdinand II)를 외증조부로 둔 그는 어려서부터 신심 깊은 아이로 성장하며 장차 수도승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명문 귀족인 보르자 가문의 장남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왕궁에 들어가 귀족교육을 받았다. 1528년에 그는 에스파냐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로스 5세(Carlos V)의 궁중 자문위원이 되었다. 황제와 황후의 총애를 받은 그는 1529년 9월 황후 이사벨라의 제1 시녀이자 포르투갈의 귀족 출신인 레오노르 데 카스트로(Leonor de Castro)와 결혼해서 8명의 자녀를 두었다.
1539년 5월 황후 이사벨라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는 삶의 큰 변화와 함께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왕의 명령으로 장례식이 거행되는 그라나다(Granada)까지 황후의 시신을 운송하고, 매장 직전 황후의 썩어가는 시신을 보며 세상이 주는 화려함보다는 하느님을 위해 살고 싶은 열망을 품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카탈로니아(Catalonia) 지방 총독을 지내고, 1543년 부친이 사망하면서 제4대 간디아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공작으로 재임하면서 그는 예수회의 초창기 회원들을 알게 되어 그들과 영적 교류를 나눌 기회를 얻었다.
1546년 그의 아내가 8명의 자녀를 남기고 사망했을 때, 그는 세상의 모든 영예를 버리고 수도 생활을 추구하려는 강한 열망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장남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자녀들을 위한 충분한 준비를 마련해준 후 예수회에 입회했다. 예수회원으로서 수련과 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1551년 5월 23일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잠시 본당 사목을 경험한 그는 1554년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에 의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두 관구를 감독하는 총장대리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는 많은 수도원을 건립하고 대학을 설립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1565년에는 예수회의 제3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7년 동안 총장직에 재임하는 동안 그는 예수회를 가톨릭 개혁 운동의 기수로 만들었다. 그는 해외 선교사업에 예수회의 참여를 독려하고, 그레고리안 대학교 설립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 됨은 물론 폴란드 관구 설정, 프랑스의 대학 설립, 아메리카 선교 개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567년 그는 예수회의 회칙을 개정했고, 1571년에는 교황 비오 5세(Pius V)의 명으로 보넬리(Bonelli) 추기경과 함께 투르크 군과 싸우고 있는 군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유럽의 주요 도시를 여행했다. 이 여행으로 건강을 해친 그는 로마로 되돌아와서 1572년 9월 30일 폐렴으로 선종해 하느님 품에 안겼다.
예수회를 그토록 왕성하고 생기 있는 수도회로 만든 이유로 그는 흔히 예수회 제2의 설립자로 불린다. 그는 1624년 마드리드(Madrid)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670년(또는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시신은 마드리드에 있는 예수회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1931년 에스파냐 내란 도중 성당과 함께 소실되었다. 그의 축일은 1688년 보편 전례력에 들어가면서 선종일과 가까우면서 다른 축일과 겹치지 않도록 10월 10일로 정해졌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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