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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라남도 여행] 담양 소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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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을 만든 사람은 양산보라는 사람으로 1503년에 태어나 1557년 생을 마감한 이다.

15살에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는데 스승이 바른 정치를 구현하다 기묘사화(1519)에 연루되어 화순 능주에서 귀양을 살다 사약을 받고 죽게되자 17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둔, 처사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이는 선비가 불행하게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도를 마음에 담아둘 뿐 펼치지 못하며 교화는 자신의 집안으로만 그치고 넓혀지지 못한다는 옛적의 말을 볼 때 그로 인해 양산보는 선비의 큰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학문에 힘쓰며, 지역의 선비와 교류하고 나무와 화초를 가꾸고 원림을 조성하며 바른 삶을 살아간 선비의 본보기가 되었던 사람이었음을 알수 있다. 

소쇄공의 행적을 기록한 글을 보면 본래 덕성이 높은데다 또한 조용한 곳에서 오랫동안 학식을 함양했으니 알차고 참된 인격자로서 호남에서 위대한 선비로 존경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안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언제든지 부모 곁에 있으면서 환한 얼굴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조석으로 인사드리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사람에 있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하였으며 사람의 자식된 자로서 부모에게 효도를 못하는 자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수백마디로 된 효부(孝賦)를 지어 효에 대한 근본정신과 사상을 밝혔다.

더욱이 한문에 밝지 않은 일반인들의 이해를 위해 한글을 세기어 적는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퍽 감동적인 책이라 아니할수 없다.” 라고 후학인 이민서는 소쇄공을 얘기하고 있다. 

그의 부인은 광산김씨로 정랑 김후의 따님이며 환벽당 주인인 사촌 김윤제의 누이였다.

결혼을 한 해는 언제인지 확실치 않지만 19세에 첫 아들을 낳고 21세에 차남인 자징이 태어나고 25세에 셋째 아들이 태어났으며 그 해에 부인이 죽게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양산보의 생애는 크게 세가지로 구분 지을수 있다.

1517년 이전까지의 성장기와 1517년부터 1519년까지의 수학기,

그리고 1519년부터 생애를 마감할때까지의 낙향 은일기로 쉽게 나누어 볼수 있는데 그중 은일기인 20대에는 이미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았으며, 소쇄원에 대한 일단의 공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30대에는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등과의 학문적 교유와 더불어 구체적인 소쇄원의 조영에 들어갔으며 40대 초반에 완결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0대 중반에는 벼슬길에 천거를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고 은일하며 부친에 대한 효성을 다하였고, 50대에는 생을 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소쇄원 지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하서 김인후의 소쇄정 즉사(소쇄정에 올라 즉석에서 지은 시)”가 쓰여진 것이 1528년인데 송강 정철이 지은 소쇄원제 초정이란 시에서 '자신이 태어난 해에 이 정자가 조성되었다' 하여 1536년으로 혼돈 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면앙정 송순의 종제양언진소쇄정1534년에 만들어진 것을 보더라도 1520년 중반 소쇄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536년경 1차적인 완성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이 소쇄원을 만든 주인 양산보는 후손에게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것이며, 후손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지역이 정유재란때 왜적들의 집중적인 공략을 받았기 때문에 소쇄원의 건물들이 불에 타버리고 주인의 손자인 양천운이 다시 중건하게 된 기록이 남아있으며, 5대손인 양경지에 의해 완전 복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소쇄원은 은둔을 위한 정자이지만 그의 곧은 뜻을 알게된 사림들은 소쇄원을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주인과 교류를 하게 됨으로서 열린 공간으로 호남 사림의 명소가 된 것이다.

소쇄원 주인과 교류하였던 인사들의 면모를 보면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었다.

이후 소쇄원은 양산보의 유훈대로 후손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15대에 이르고 있다.

출처 : http://www.soswaewon.co.kr/

 

 

 

 

 

 

 

 

 

 

 

 ↑ 2013년 9월 입장요금

↑ 2015년 9월 입장요금

 

 

 

 

 

 

 

 

 

 

 

 

 

 

 

 

 

 

 

 

 

 

 

 

 

 

 

 

 

 

 

 

 

 

 

 

 

 

 

 

 

 

 

 

 

 

 

 

 

 

 

 

 

 

 

 

 

 

 

 

 

 

 

 

 

 

 

 

 

 

 

 

 

 

 

 

 

 

 

 

 

 

 

 

 

 

 

 

 

 

2013.9.3, 201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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