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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경상남도 여행] 통도사 - 매화, 홍매화, 산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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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있어 불보(佛寶)사찰이라고도 한다.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통도사라 한 것은,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통도사라 이름했고(此山之形通於印度靈鷲山形),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계단(戒壇)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으며(爲僧者通而度之),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중생을 제도(濟道)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 유래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에 따라 통도사를 창건하고 승려의 규범을 관장, 법식(法式)을 가르치는 등 불법을 널리 전한 데서 비롯된다. 이때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아, 승려가 되고자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득도케 하였다.

이렇게 창건된 이 절은 이후 계율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신라의 승단(僧團)을 체계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창건의 정신적 근거이며 중심인 금강계단은 자장과 선덕여왕이 축조하여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이후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경내의 건물들은 대웅전과 고려 말 건물인 대광명전(大光明殿)을 비롯하여 영산전(靈山殿극락보전(極樂寶殿) 외에 12개의 법당과 보광전(普光殿감로당(甘露堂) 외에 6(), 그리고 비각(碑閣천왕문(天王門불이문(不二門일주문(一柱門범종각(梵鐘閣) 65580여 칸에 달하는 대규모이다. 이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1(선조 34)41(인조 19)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는데 대광명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세의 건물들이다.

이 사찰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있어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는 대웅전이 국보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밖에 보물 제334호인 은입사동제향로(銀入絲銅製香爐), 보물 제471호인 봉발탑(奉鉢塔)이 있고, 보물전시관에는 병풍·경책(經冊불구(佛具) 및 고려대장경(해인사 영인본) 등의 사보(寺寶)가 소장되어 있다. 소속 암자로는 선원(禪院)인 극락암을 비롯하여 백운암·비로암 등 13개의 암자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통도사 [通度寺] (두산백과)

우리 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佛寶·法寶·僧寶로 일컬이지는 세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佛寶)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646(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산 이름을 영축산이라 한 것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나, 그 옛 이름은 축서산(鷲棲山)이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까닭은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得度)한다는 뜻,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산형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 등이 있다.

창건주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 가사(袈裟),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초창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다. 특히 불사리와 가사뿐 아니라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역사 기록은 통도사의 사격(寺格)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는 계단(戒壇)을 쌓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맞아 득도시켰다. 이에 통도사는 신라 불교의 계율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대찰이 아니고 후에 금강계단이라고 불려진 계단을 중심으로 몇몇 법당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 뒤 고려 초에는 사세가 더욱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둘 만큼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특히 현존하는 중요 석조물이 고려 초기 선종대에 조성되었으므로, 가람의 정비는 이때 중점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중요한 석조 조형으로는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 배례석(拜禮石), 봉발대(奉鉢臺), 그리고 국장생석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속하는 유물이고 그 밖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되었다.

물론 조형상으로 가장 앞서는 석조물로는 영산전(靈山殿)에서 마주 보이는 남산 위의 폐탑재를 들 수 있으나, 이는 이미 파괴된 채 기단부의 사리공(舍利孔)만이 주목되고 있다. 이 석탑이 어떻게 하여 파괴되었는지 또는 최초에 건립된 사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 가람배치

통도사의 가람배치는 신라 이래의 전통 법식에서 벗어나 냇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향하였는데. 서쪽에서부터 가람의 중심이 되는 상로전(上爐殿)과 중로전(中爐殿하로전(下爐殿)으로 이어진다. , 그 서쪽 끝에 보광선원(普光禪院)이 자리잡고 있다.

본래 이 절터에는 큰 못이 있었고 이 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으나 창건주 자장율사가 이들을 제도하고, 한 마리 용을 이곳에 남겨 사찰을 수호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신지(九龍神池)의 자그마한 상징적 못이 있다.

먼저 동쪽에서부터 일주문(一柱門천왕문(天王門불이문(不二門)의 세 문을 통과하면 금강계단에 이르게 된다. 금강계단 앞의 목조건물인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45(인조 23) 우운(友雲)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상부의 기본 형태는 자형의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정면격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을 대웅전이라고 하지만 남쪽 정면의 금강계단이 그 정전이라 할 수 있다. , 이 건물의 바로 뒤쪽에는 통도사의 중심이 되는 금강계단 불사리탑(佛舍利塔)이 있다. 이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불사리를 세 곳에 나누어 황룡사탑·태화사탑, 그리고 통도사 계단에 봉안하였다고 하는 바로 불사리 계단이다. 통도사의 특징은 이 불사리 계단에 있으며 또 이로 인하여 불보사찰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부처의 신골(身骨)인 사리를 봉안하였으므로 대웅전 내부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으며, 내부에는 불상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佛壇)이 조각되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 의미는 계단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는 신앙 때문이다. 그리고 금강계단 목조건물의 천장에 새겨진 국화와 모란꽃의 문양 또는 불단에 새겨진 조각은 주목되는 작품이다.

 

(2) 상로전

상로전의 법당은 금강계단과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應眞殿명부전(冥府殿삼성각(三聖閣산신각·일로향각(一爐香閣)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된 응진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서 창건한 시기는 1677(숙종 3)이며, 내부에는 석가삼존과 그 주위에 16나한상(十六羅漢像)을 봉안하였다. 후벽의 탱화를 위시하여 내외 벽화는 주목되는 불화들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5호로 지정된 명부전은 1369(공민왕 18)에 창건되었고, 1760(영조 36) 춘파(春波)가 고쳐 지은 건물로서,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十王像탱화를 봉안하였다.

삼성각은 고려 말의 삼화상(三和尙)인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의 영정을 봉안한 건물로서, 1870(고종 7) 영인(靈印)에 의하여 창건되었고, 현존 건물은 1935년 경봉(鏡峰)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건물의 내부 측면에는 산신탱(山神幀칠성탱(七星幀)을 봉안하고 있으며, 산신각은 1761년에 초창된 이래 철종대에 중수를 거친 사방 1칸의 건물이다.

 

(3) 중로전

중로전의 건물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된 관음전(觀音殿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용화전(龍華殿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된 대광명전(大光明殿세존비각(世尊碑閣장경각(藏經閣해장보각(海藏寶閣황화각(皇華閣감로당(甘露堂원통방(圓通房화엄전(華嚴殿전향각(篆香閣) 등을 들 수 있다.

관음전의 창건은 1725년 용암(龍岩)에 의하여 이룩되었으며, 내부에는 독존상으로 관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다. 용화전은 1369년에 창건되었으나 창건주는 미상이며, 1725년 청성(淸性)이 중건하였다. 내부에는 역시 약 2m에 달하는 미륵좌상을 봉안하였다. 대광명전은 중로전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로서 정면 5, 측면 3칸이며,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세존비각은 1706년에 건립된 사바교주 석가여래 영골부도비의 비각으로서 불사리 계단에 대한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채팽윤(蔡彭胤)이 지었으며 중국에서 자장율사가 가져온 불사리·가사 등에 관한 내용과 임진왜란 당시 사리 수호에 따르는 수난의 사실들을 기재하였다. 비신의 높이는 약 2.5m, 너비는 약 1m이다.

장경각에 있는 목조 경판은 능엄경 楞嚴經·기신론 起信論·금강경·법수 法數·사집 四集·부모은중경15종이 있다. 개산조당(開山祖堂) 바로 뒤에 있는 해장보각은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주위에는 고려대장경 완질이 봉안되어 있다. 요사(寮舍)의 중심이 되는 감로당은 창건이 1340(충혜왕 복위 1)이나 현존 건물은 1887(고종 24) 덕명(德溟)이 중건한 것이다. 자형 건물로서 약 86칸의 대소 방사로 이루어져 있다.

감로당과 가까운 원통방은 1341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현존 건물은 감로당과 함께 탄해(坦亥)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화엄전은 창건이 1368년이며, 1762년에 중건하였고, 1882년 불타서 없어진 것을 1887년 구련(九蓮)이 중건하였고, 1970년 재건하였다.

 

(4) 하로전

하로전의 중요 건물들은 영산전·극락전·약사전(藥師殿만세루(萬歲樓영각(影閣범종각 등이 있다. 이들 건물배치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배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북쪽의 중심 건물과 그 좌우, 그리고 남쪽 전면에 누각을 두었다. 이러한 배치 방식은 하로전 일대의 건물군이 가장 짜임새 있게 배치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곳 일대의 법당들의 중요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 중심 건물은 영산전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된 영산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내외 벽의 벽화가 주목되고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 불상과 팔상탱화(八相幀畵)를 봉안하였다. 팔상탱화는 1775년에 그린 것이며, 본존 후불탱은 1734년의 작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양식이나 구조로 볼 때 대웅전 건물과 함께 가장 주목받는 건물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1369년 성곡(星谷)이 창건한 정면 4,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추녀의 네 귀는 활주로 받치고 있는 아담한 법당으로, 내부에는 아미타삼존을 봉안하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된 약사전 또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동시에 창건한 아담한 맞배건물이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된 만세루는 창건이 미상이나 1644년 영숙(靈淑)이 중건하였다.

역대 조사(祖師) 및 통도사 고승들의 진영을 봉안한 영각은 1705년 처학(處學)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범종각은 2층 누각 건물로서 정면 상하 3, 측면 2칸의 팔작건물이다. 건물의 상하에 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대종(大鐘) 등 사물(四物)을 안치하였다. 이들은 모두 조석 예불시에 사용하는 의식용구이다. 그리고 1757년에 건립한 응향각(凝香閣), 도서실인 명월료(明月寮)와 금당(金堂)을 위시하여 종무소 건물들이 즐비하다.

, 절의 세 문 가운데 일주문은 1305(충렬왕 31)에 창건되었으며, 현존하는 현판은 대원군의 필적이며, 기둥 좌우의 佛之宗家 國之大刹(불지종가 국지대찰)’은 김규진(金圭鎭)의 글씨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된 천왕문은 사천왕을 봉안한 문으로서 사찰수호 기능을 담당하는 곳으로 목조 사천왕이 각기 특징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된 불이문은 1305년에 창건되었으며, 편액 不二門(불이문)’은 송나라 미불(米芾)의 필적이다. 건물은 매우 단조로우며, 중앙에는 대들보 대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리를 받쳐 지붕의 무게를 유지하는 건물이다.

사찰 경내의 현존하는 석조물로는 역시 금강계단이 가장 중요하다. 통도사 창건의 이유가 바로 이 계단에 있기 때문이다.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불사리 계단이 축조된 이래 특히 고려시대에 와서는 이 계단에 얽힌 수많은 기록이 전해 오고 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계단의 석종을 들어 보려는 일이 잦았으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석함 속에는 긴 구렁이 또는 큰 두꺼비가 있었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1235(고종 22) 상장군(上將軍)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郎) 유석(庾碩)에 의하여 계단의 석종이 들려졌다.

큰 일에 상장군 김공 이생과 유시랑 석이 고종의 명을 받아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왕이 하사한 )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뚜껑을 들어 예하고자 하니, 승이 그 전의 일을 들면서 어렵다고 하였다. 김이생과 유석이 군사를 시켜 굳이 돌뚜껑을 들게 하였다……. 서로 돌려보며 예경하였는데 통이 조금 상해서 금간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이 수정함(水晶函)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침 기부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그때는 강화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째인 을미년(1235)이었다(三國遺事 卷3 前後所將舍利條).”

이와 같은 기록이 문헌상으로는 계단에 손을 댄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다가 1379(우왕 5) 고려 말에 국세가 약해진 틈을 타서 빈번히 왜구들이 침입하여 이 계단은 일대 수난을 겪는다. , 이색의 양주통도사석가여래사리기 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記에 따르면 통도사의 주지 월송(月松)이 왜구들의 침입을 피하여 1379824일 석가여래의 사리·가사 등을 가지고 서울의 평리(評理) 이득분(李得分)을 만난 일이 있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영남지방이 왜구의 수중에 들자 의승장 유정(惟政)은 통도사의 사리를 대소 2함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던 휴정(休靜)에게 보냈다. 이에 휴정은 영남이 침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곳 역시 안전한 장소는 못된다. 영축산은 뛰어난 장소이고 문수보살이 명한 곳이다. ()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신보(信寶)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을 수리하여 안치하라.”고 하였다.

이에 1함은 돌려 보내고 나머지 1함은 태백산 갈반지(葛盤地)에 안치하였다. 그 뒤 1603(선조 36) 계단을 다시 복구하였으며, 1652(효종 3) 정인(淨人), 1705년에는 성능(性能)이 중수하였으며, 그 뒤에도 영조·순조·헌종·고종 대에 이르는 여러 차례의 중수와 1919년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단의 크기는 초층 너비 약 990, 총높이 약 300이며, 형태는 2중의 넓은 방단(方壇) 위에 석종(石鐘)의 부도를 안치한 지극히 간단한 구조이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입상을 배치하였고, 기단 상하면 돌에는 비천상과 불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석단 외곽에는 석조 난간을 돌렸고, 계단 정면에는 석문을 두었으나 모두 후기의 작이다. 계단의 초층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나타냈으나 모두 도상적 경직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상층 기단 면석의 불보살 및 비천상의 양식은 유연한 수법이 하층보다는 월등하다.

계단의 상층 중심부에 위치한 석종부도는 복련과 앙련의 상하 연화대 위에 위치하며, 그 조각수법이 다른 조각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 동서 좌우에는 유연한 비천상을 부조로 나타냈고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보합(寶盒)의 향로를 조각하였다.

대체로 통도사의 석조물은 고려 선종대를 전후하여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그 대표적 조형으로는 극락전 앞의 배례석·삼층석탑, 그리고 사지경계(四至境界)인 국장생석표 등이다.

 

(1) 배례석

먼저 배례석이란 국왕배례지석(國王拜禮之石)이라는 상징적 조형물로서 신라 사찰에서도 자주 볼 수 있으나 이곳 배례석은 1085(선종 2)에 조성되었다. 길이 175, 너비 87의 판석으로 3절되었으며, 상면에는 아름다운 연화문과 운문으로 조각되었다. 현재의 명문은 太康王一年乙丑二月日造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太康十一年乙丑二月日造의 위각이고 또 중간의 판석(길이 35, 너비 87)도 후에 보충된 것임이 최근 판명되었다.

 

(2) 삼층석탑

이와 함께 배례석 바로 옆에 있는 삼층석탑 역시 신라 말기의 양식이나 이 시대 선종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2중기단 위에 3층의 석탑으로서 전체 수법은 간략하게 조성되었으나 기단에 나타난 안상(眼象) 등 장식된 수법은 고려의 석탑으로 볼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3) 국장생석표

그리고 통도사에서 약 2거리의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의 보물 제74호로 지정된 국장생석표 역시 고려 선종대의 사찰 경계로 알려져 있다. 이와 동일한 명문을 지닌 장생석표가 울산광역시 울주구 삼남면 상천리에서 근래 발견되었으나 상부가 단절되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 의하면 이와 같은 표지는 절을 중심으로 사방에 12장생을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형태는 목방(木榜석비(石碑석적장생(石磧長生) 등으로 분류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석비장생뿐이며, 이들은 고려시대 이두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금석문이다.

그 밖에 이 절에 현존하는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34호인 통도사은입사동제향로(通度寺銀入絲銅製香爐), 보물 제471호인 통도사 봉발탑(通度寺奉鉢塔)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인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6호인 자장율사 진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7호인 삼화사 진영 3,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8호인 팔금강도 8, 보물 제1041호인 팔상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0호인 영산도 영상회상도, 보물 제1042호인 대광명전 산신불도가 있다.

그리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9호인 대광명전 신중탱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1호인 오계수호 신장도, 보물 제757호인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紺紙金泥大方廣佛華嚴經, 보물 제738호인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 文殊師利菩薩最上乘無生戒經, 보물 제1194호와 보물 제1196호인 묘법연화경, 보물 제1195호인 수능엄경,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인 청동은입사향완 2,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인 청동은입사정병(靑銅銀入絲淨甁)이 있다.

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4호인 청동여래좌상·청동사리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인 인적(印籍동인(銅印) 2,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6호인 청동여래입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9호인 동종,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0호인 청동시루,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1호인 동판천문도(銅板天文圖),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금니법화경 金泥法華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인 금니금강경등이 있다.

그 밖에 전석가여래가사()·전자장율사가사()·고려은입사동제향로()·청개와()·감로병()·육환철장()·동자상()·동탑()·화엄만다라()·육각요령()·금자병풍()·구룡병풍()·삼장서행노정기(西) 등이 있다.

산내 암자로는 극락암·비로암·자장암·백운암·축서암·취운암·수도암·사명암·옥련암·보타암·백련암·안양암·서운암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사 [通度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봄이다. 개울은 졸졸졸 소리내어 흐른다.

 

 

 

버들강아지 주위에 꿀벌이 날아든다.

응? 꿀벌? 벌써 활동하기 시작했다.

 

 

쑥이 올라왔다. 쑥도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매화가 피었다. 아직은 이른 봄이다.

 

 

  

  

홍매화도 피었다. 꿀벌이 꿀을 찾는다.

 

 

 

 

산수유는 "좀 더 기다려줘."라고 말한다.

 

 

 

 

 

 

 

 

  

 

 

 

 

 

 

 

 

 

 

 

20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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