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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천주교, 가톨릭 세례명 축일] 천주의 성 요한 수도자 -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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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0/Sao_Joao_de_Deus.JPG

 

천주의 성 요한(Joannes de Deo)은 1495년 3월 8일 포르투갈 몬테모르오노보(Monte-Mor O Novo)에서 태어났다.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8세 때에 한 순례자를 따라 가출하였다. 순례자를 따라 에스파냐까지 간 그는 오로페사(Oropesa)라는 도시에 사는 마요랄(Mayoral)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마요랄의 집에서 글공부와 허드렛일을 익혀 가면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학교 공부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가축을 돌보는 일을 하며 양치기 목동으로서 28세까지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자 그는 오로페사 백작의 군대에 편입되어 에스파냐를 방어하기 위해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 시기에 요한은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방종한 생활을 했으며, 자신이 담당하는 전리품이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해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군대에서 추방당했다. 그 후 예전처럼 양치기 목동 생활을 하던 그는 다시 터키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비엔(Vienne)을 방어하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에 지원하였다. 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군대가 해체되자 요한의 군대 생활도 끝났다.

그 후 그는 감사기도를 드리기 위해 에스파냐의 북서부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새로운 장을 여는 출발점으로 그는 많은 시간을 묵상과 기도로 보냈다. 그러던 중 그는 포르투갈의 영토로서 전략적인 요새였던 북아프리카의 수타 지역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떠났으며 그곳에서 잠시 생활하였다. 수타에서 돌아온 후 요한은 그라나다(Granada)의 엘비라(Elvira) 성문 옆에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 책과 십자가, 성물 등을 파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539년 1월 20일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축일에 성 요한은 아빌라의 성 요한(5월 10일)의 강론에 큰 감명을 받아 회심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런 그의 생활을 본 주변 사람들은 그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여겨 왕립 병원으로 데리고 갔고, 거기서 그는 모진 시련을 겪었다. 성 요한은 퇴원한 후 과달루페의 성모 마리아 성지를 순례하고 그곳에서 병원 운영과 병자 간호에 필요한 기본적인 일들을 배웠다. 그라나다로 다시 돌아온 성 요한은 그라나다의 주교와 베네가스(Venegas)라는 은인의 도움으로 1539년 12월말에 루체나(Lucena) 가도에 처음으로 '자선의 집'을 개원하였다. 그는 환자들이 따뜻하고 깨끗한 생활을 영위하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지내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의 활동이 가끔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길거리의 창녀와 부랑자들을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540년에 에스파냐 국왕의 고문이며 그라나다를 관할하고 있던 투이(Tuy)의 주교 라미레스(Ramirez)는 성 요한을 만찬에 초대해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천주의 요한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하사하였다. 그의 높은 성덕과 헌신 덕택으로 수많은 재산가와 왕족들이 그의 사업을 위하여 많은 지원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성 요한은 심장 울혈증과 관절염, 안구 이상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으나 쉬지 않고 일하였다. 하지만 결국 1550년 3월 8일 자신이 태어난 날,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선종하였다. 천주의 성 요한은 1630년 9월 21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690년 10월 16일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1886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그를 병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으며, 1930년 8월 28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모든 간호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천주의 성 요한은 살아 있을 때 직접 수도회를 설립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 의해서 후에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교황 비오 5세는 그를 일컬어 “교회의 뜨락을 온전히 꾸미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한 송이 꽃”이라고 하였다.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설립된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 1572년 1월 1일 교황 비오 5세의 승인을 받아 교황청 직속 수도회로 설립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천주의 성 요한(스페인어: San Juan de Dios; 포르투갈어: São João de Deus, 영어: John of God)(149538~ 155038)은 포르투갈 출생의 수사이고, 스페인의 한 수도회의 설립자이자 그 수도회의 지도자이며, 사후에 로마 가톨릭의 성인으로 공경 받는다.

천주의 성 요한은 포르투갈 몬테모르 오 노보에 있는 한 마을의 가난하지만 종교적인 믿음이 투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그가 아기였을 때 죽었고, 부친은 수도회에 들어갔다.

어린 성 요한은 농장에서 양치기를 하며 육체를 단련시켰고, 그 일에 큰 기쁨과 만족을 느꼈다. 요한은 농장주의 딸과 결혼하여 농장의 상속자가 될 것을 권유받았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에 뜻에 따라 봉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권유를 거절했다.

그는 스페인으로 떠나,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 휘하의 군인으로 복무했고, 몇 차례의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전쟁에서 많은 공훈을 세웠고, 그 후에 사람들에게 성경을 알리기 위해서 새로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기를 사용해 인쇄된 종교 서적들을 퍼트렸다.

그는 성 세바스티아노 축일(120), 아빌라의 요한의 강론을 듣고, 중요한 영적인 개종을 체험했다. 나중에 아빌라의 요한은 그의 영적인 후원자가 되어, 빈곤한 삶을 개선하려는 그의 노력에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뒤에 성 요한은 일시적인 정신 이상 증세가 나타나, 정신병 환자로 취급받아 정신병자 수용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정신병원 수용소에서 성 요한은 부당한 처우를 받았는데, 아빌라의 요한이 수용소를 방문하고 난 뒤에 성 요한은 증세가 회복되었다. 그는 불쌍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 곳에서 받는 처우보다 더 낫게 해주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남은 여생을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며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스페인 그라나다에 정착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정열을 불태웠다. 서서히 그의 헌신적인 봉사를 본받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의 봉사회에 들려는 제자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성 요한은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의료봉사회를 설립했고, 그 공동체는 오늘날의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노고에 대한 명예로운 한 표상으로, 그 수도회는 교황의 공식적인 의료봉사와 치과봉사의 수도회가 되었다.

그는 155038, 5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8세에 의해 16901016일에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후일에 병원, 병자, 간호사, 소방관, 알코올중독자, 책 판매상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다. 성 요한의 공경 축일은 38일이다.

 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B2%9C%EC%A3%BC%EC%9D%98_%EC%9A%94%ED%95%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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