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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천주교, 가톨릭 세례명 축일] 성 사투로, 성 레보카토, 성 사투르니노, 성 세쿤둘로 -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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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의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와 동료들의 순교

(by Anonymous from Miniature Minology of Basil II in the Vatican Library Vatican City.jpg)

출처 : 가톨릭 굿뉴스

 

성녀 페르페투아(Perpetua)와 성녀 펠리치타(Felicitas) 그리고 네 명의 동료 순교자 이야기는 초기 순교자들의 전기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적이다. 특히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의 수난기”(Passio SS. Perpetuae et Felicitatis)는 성녀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하녀였던 성녀 펠리치타의 순교에 관한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으로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도 이 수난기를 자주 인용하였다. 이 수난기의 내용은 성녀 페르페투아가 감옥에 갇혀 경험한 것을 직접 적은 기록과 다른 순교자들이 기록한 것을 모아 하나의 전기로 완성되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는 칙령을 반포하여 제국 내의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인 되는 것을 금지하고, 이에 불응하면 혹독하게 처벌하였다. 그로 인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진 203년, 귀족 가문의 딸로서 어린 아들을 둔 22살의 어머니였던 성녀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하녀로 임신 8개월이었던 성녀 펠리치타는 예비신자로서 교리를 배우는 중이었다. 그들 외에도 성 레보카토(Revocatus), 성 사투르니노(Saturninus), 성 세쿤둘로(Secundulus)가 성 사투로(Saturus)에게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성녀 페르페투아는 자신과 동료들이 갇힌 감옥의 무서운 분위기와 그들이 느낀 두려움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성녀 페르페투아의 아버지는 아직 세례받지 않은 딸의 배교를 권유하기 위해 감옥까지 와서 설득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감옥 안에서 몰래 세례를 받았다. 그즈음 성녀 페르페투아는 감옥에서 환시를 경험했는데, 용과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사다리를 올라가 푸른 풀밭에서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아름다운 곳에 이르는 내용이었다. 성녀 페르페투아는 이 환시를 통해 순교가 가까웠음을 깨달았다. 재판 날이 다가오자 그녀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감옥으로 데려와 보여주며 눈물로써 거듭 설득했으나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혈육의 정까지 끊고 신앙을 지키고자 한 성녀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로마 황제를 위해 원형 경기장에서 열리는 축제 중에 맹수의 먹이로 던져질 것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한편 성녀 펠리치타는 다른 동료들과 같은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다. 이는 임신한 여인을 처형하는 것이 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고자 했던 성녀 펠리치타는 출산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고, 엄청난 산고를 겪은 후 감옥 안에서 여자아이를 조산하였다. 아기가 다른 그리스도인 여인에게 입양되어 그녀 또한 동료들과 함께 처형장으로 갈 수 있었다. 함께 갇혔던 동료 중에서 성 세쿤둘루스는 고문과 매질의 후유증으로 감옥 안에서 순교하였고, 나머지는 매질을 당한 후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하느님의 귀여운 자녀답게”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갔다. 먼저 성녀 페르페투아가 황소에 받혀 허공에 떴다가 떨어진 후 다시 일어났고, 성녀 펠리치타가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부축해 일으켜 세워주었다. 성 사투루스는 표범에게 던져져 피가 낭자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결국 성녀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참수될 장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그들은 평화의 예식으로 서로 입을 맞춘 뒤 성 사투루스부터 차례대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직전 성녀 페르페투아는 또 다른 환시를 보았는데, 어릴 때 병으로 죽은 막내 동생이 천국에서 그녀를 따라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는 4세기경부터 3월 7일에 로마에서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았고, 파스카 성야의 성인 호칭 기도문에도 추가되었다. 일찍부터 로마 전례력과 시리아 전례력에 수록되어 공경을 받아온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는 로마 미사 경본 감사기도 제1양식(로마 전문)에서 기억하는 7명의 성녀에도 포함되어 큰 공경을 받았다. 두 성녀는 그들 이름의 뜻대로 순교를 통해 주님 안에서 ‘영원한’(페르페투아) ‘행복’(펠리치타)에 이른 것이다. 성녀 페르페투아의 유해는 5세기에 로마로, 9세기에 프랑스의 한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10세기에 수도원이 노르만인들에게 약탈당한 후 다시 비에르종(Vierzon)으로 옮겨졌고, 19세기 초에 비에르종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모신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의 축일은 한동안 옛 “로마 순교록”에서 3월 6일로 옮겨 기념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과 함께 순교한 날인 3월 7일로 복원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역시 3월 7일에 두 성녀와 동료들의 순교를 함께 기념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그들의 축일은 2월 1일에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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