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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성지와 성당

[천주교 부산교구] 오륜대 한국 순교자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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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대 한국 순교자 박물관

오륜대 한국 순교자 박물관은 복음 선포와 순교자 현양을 목적으로 1946년에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에서 설립한 가톨릭 전문 박물관으로써 조선 말기 한국 순교자들에 관한 교회 유물 500여점, 민숙물 1200여점, 고서, 지본, 성화 등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에서는 설립 초기부터 사라져 가는 교회 유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문화유산과 유물을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그 후 유물을 볻 체계적이고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한국 순교자 기념관 건립을 계획하던 중, 1969년 부산 교구 초대 교구장 최재선(요한) 주교의 협조로 1982년 9월 25일에 '오륜대 한국 순교자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이후 이 기념관이 2009년 3월 2일에 '오륜대 한국 순교자 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다. 이곳에는 1868년 수영 장대에서 순교한 부산 동래 순교자들의 묘소가 있다. 이곳에 영면한 순교자 중 두분은 2014년 8월 16일에 복자품에 올랐다. 또한 한국 순교 성인 26위의 유해가 안치된 순교자 성당도 있다. 이에 따라 2013년 10월부터 부산교구는 이곳을 "오륜대 순교자 성지"로 조성하였다.

  

 

 

복자 이정식 요한(1794-1868)

이정식 요한은 동래지역에 거주하였으며 무과에 급제한 후 군 장교로써 교련관으로 근무했다. 나이 60세에 처가의 영향으로 입교하였다. 입교 후 가족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수계에 열심이었다. 1863년 다블뢰 주교가 동래 교우촌을 방문할 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언제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나자 그는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복골로 피신하였다. 1868년 가족들과 함께 체포된 후 동래로 압송된 이정식은 그곳에서 양재현을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그는 동료들과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47일동안 옥에 갇히는 고통을 겪었지만 결코 배교하지 않자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1868년 8월에 경상좌수영 장대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당시 나이는 75세였다. 그후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복자 양재현 마르티노(1827-1868)

양재현 마르티노는 동래군 북문 밖 실내동(현 금사동)에 살던 좌수였다. 후에 대부가 된 이정식을 만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1868년 무진년 박해 때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통영 우수영으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동래 좌수영으로 압송되었다. 

양재현은 관장 앞에 나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신앙을 증거하였다. 마침내 동래 관장은 사형을 결정하고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어 수영 장대로 압송하였다.

경상 좌수영에서 그는 이정식 가족과 함께 "가세. 가세. 천당으로 가세."라는 노래를 부르고 십자성호를 그은 다음 참수형을 당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그 후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의 시신이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고 했지만, 후에 어떻게 이장을 했는지 알 수가 없고 오륜대 순교자성지에는 가묘만 있다.

  

오륜대 순교자 성지 상설고백소

매주 금요일 오후 2시~5시

담당사제

1주 : 김경욱, 권동성 신부

2주 : 심상윤, 고원일 신부

3주 : 홍영택, 인상현 신부

4주 : 이철희, 손원모 신부

5주 : 윤명기, 윤정현 신부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

  

순교자 시복, 시성 도보 성지순례길

순례기간 : 2008.8.30.~2014.5.24.(매월 마지막 토요일)

순례구간 : 수영 장대 순교성지 ~오륜대 순교자 성지(14km)

  

 

성물판매소

 

오륜대 순교자 성지는 부산교구에서 순교하신 8분의 순교자 묘소가 안장되어 있는 곳입니다.

8분의 순교자들 중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는 복자푸에 오르게 되었으며 미구에 성인품에 오르시게 될 것입니다.

또한 순교자 성당에는 103위 순교성인들 중 26위의 성인 유해를 모시고 있으며,

한국 순교자 박물관은 순교신심 함양을 위해 유익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순교자 정신을 계승하고 성지 개발과 보존을 위한 신자분들의 관심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 성지안내 -

미  사 : 매일 오전 11시(월~주일)

고  백 : 매 미사 30분전부터

박물관 : 오전 10시~오후 6시 개관(월요일은 휴관)

   

 

 

오륜대 순교자 성지

오륜대 순교자 성지는 부산에서 슌교하신 8분의 '부산순교자묘소'와 한국 순교 성인 103위 중 26위의 유해를 안치한 '순교자 성당'이 있는 곳이다. 이곳 부산지역에서는 1866년 벽인박해에 이어 1868년 무진년 8월 4일(양력 9월 20일) 수영 장대에서 이정식 요한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이정식의 대자였던 양재현 마르티노를 비롯하여 함께 옥에 갇혔던 여덟분의 신자들이 군문효수의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후 명장동(동래구 명장동 산 96번지)에 묻혀 있던 이정식 요한 회장의 가족 네 분의 무덤만이 조사 확인되어, 1977년 9월 19일 이곳 오륜대로 이장하여 '부산 순교자 묘소'로 꾸몄다.

그리고 1982년 9월에 개관된 '한국 순교자 기념관'이 2009년 3월부터 1종 전문박물관인 '오륜대 한국 순교자 박물관'으로 승격되어 순교자들의 유물과 박해시대의 유물 및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가신 님 그리워

아슴한 자국을 더듬나니

믿음의 핏줄이

나를 불사른다.

  

 

 

 

 

 

 

 

척사비

대원군의 명에 의하여 천주교 및 서양과 왜를 배척하면서 전국에 세웠던 비

 

 

 

한국 교회 창림 200주년 때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

한국인이 우수한 민족이라는 점은 하나의 혈통, 하나의 말, 하나의 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교리성성 차관 베르또네 대주교의 부산 방문 강론중에서(1999.10.31.)

한국과 로마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선포한 것은 "예수는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이다.

구세주 강생 2000년 대희년 기념비

  

성 골롬바, 아녜스 자매 동상

  

박물관 관람료 안내

본 박물관은 설립 후 30년 동안 '정성어린 헌금'으로 운영하였습니다.

이제 보다 나은 전시 환경과 교회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하여 아래와 같이 관람료를 책정하여 시행하고자 합니다.

따뜻한 이해와 배려의 마음으로 지속적인 후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어린이 : 1,000원       청소년 : 1,000원       성인 : 1,000원

  

 

관람시간

오전 10:00~12:00   오후 1:00~5:00

정기휴관 : 매주 월요일, 관람문의 : 582-2920

  

문화관광해설 서비스

문화관광해설사가 역사문화 관광자원에 대한 스토리텔링 해설서비스를 해드립니다.(근무시간 10:00~17:00)

 

 

돌형구

일명 돌교수대라고도 한다. 병인박해 때 대원군은 천주교인들을 너무 많이 학살하여 민심이 동요되자 정치적으로 불안을 느낀 나머지 "소리없이 죽이는 기계"를 만들라는 명을 내린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돌형구이다. 목에 밧줄을 걸로 돌구멍에 꿰어 잡아 당겨 죽였다.

      

 

최양업 신부상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본래 사찰이나 관청의 마등에 깃대로 사용했던 것이나 대원군 박해 때 교우들을 잡아다가 묶어놓기도 하고 이것을 이용하여 고문하는 형구로도 사용하였다.

  

라파엘호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고, 페레올 고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대동 이 배를 타고 상하이에서 출항하여 풍랑과 싸우며 제주도에 표류 끝에 강경 황산포에 상륙하였다.(이것은 고증에 의거 1/2로 건조한 것임)

  

 

천주의 밭은 땅이요 사람은 좋은 씨앗이다.

김대건 신부님의 말씀

  

성 김대건신부 순교 150주년, 최양업신부 탄생 175주년 기념비

103위 성인시성 기념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약력

1821.8.21.    충남 솔뫼에서 출생

1836.           나 베드로 신부님께 영세, 견진

1837.6.7.      신학공부를 위해 육로로 마카오에 도착

1844.12.15.  고 주교님께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음

1845.1.15.   서울에 도착, 석정동에 은거

1845.4.30.   목선타고 상해로 감

1845.8.17.   긴가함에서 사제서품

1846.1.       경향에 포교하여 연평 출발 준비

1846.4.8.    용인 은이 근처 골베마실에서 최후 미사

1846.6.5.    순위도 근처에서 밤에 체포됨

1846.9.16.  새남터에서 순교

1925.7.5.   로마에서 시복됨

1984.5.6.   서울에서 시성됨

   

 

 

최양업 도마 신부, 다블뤼 안 부주교, 리델 이 신부

박해시대의 이 고장 목자들

한강가에 갓 심어진 복음의 씨앗이 흙내음도 채 맡기도 전에 박해로 시달리던 한 무리가 있었으니 이 고달픈 길손들은 경주 진목정을 거쳐 이윽고 언양 간월골에 이어 살티, 양산 대석, 해기, 달밭골, 먹벵이에서 화전을 일구고 질그릇을 구우며 교우촌을 이루었다. 매몰스레 조여드는 박해의 폭풍은 오히려 동래, 기장, 김해에까지 복음의 씨를 더욱 멀리 날렸으니 전화위복의 헤아릴 수 없는 크신 님의 섭리가 가맙다

최양업 신부는 1858년 쯤 영남 지방에 흩어진 교우촌 여덟개소를 살얼음 걷듯이 찾아다니는 중 이 고장의 허기진 양떼를 돌보았다. 최 신부가 1861년 사망한 후 다블뢰 안 부주교가 같은 지역을 맡은 다음 1863년에는 열 여섯 내지 열 일곱개의 교우촌으로 불어나 이곳들을 숨가쁘게 순방하였다.

1864년 안 부주교가 충청도를 담임하게 됨에 따라 리델 이 신부는 이 고장에까지 순회하면서 1866년 병인박해 직전까지 피나는 사목활동으로 일구어 놓은 이 값진 터전, 이젠 여기 아래 나릿골 언저리에는 믿음의 씨밭이 푸르렀다.

일천구백팔십사년 사월 제춘규 짓고 강영세 쓰다.

 

 

 

 

 

 

 

장대돌

동래순교자 여덟분은 무진박해 중 1868년 수영장대에서 당시 경상좌도수군절도사 구주원에 의해 군문효수형이 집행되어 용감히 순교하였다. 여기 이 돌은 수영장대에 흩어져 있던 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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