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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가톨릭, 천주교 세례명 축일]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 은수자 -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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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라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파울라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16327일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 지방 코센차(Cosenza)의 파울라에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는 산마르코(San Marco)에서 프란치스코 회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13세 때에 산마르코 수도원에서 1년 동안 생활하면서 기도와 금욕과 겸손을 익혔다. 그리고 15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영지인 파울라 교외에서 홀로 지내며 6년 동안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동료들이 불어나서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공동체가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Minimi Fratres, least brothers)의 시작이었다. 그는 자신이 은수생활을 하던 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회개와 애덕 그리고 겸손을 특히 강조하는 회칙을 확정하였으며, 세 가지 서원 외에 단식과 음식의 절제 서원을 덧붙였다. 또한 그는 3회원과 수녀회를 위한 회칙을 만들었다.

그의 생활이 거룩하고도 엄격하였던 만큼 그의 영적 영향 또한 커졌고 특히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명성은 곧 프랑스로 번졌다. 그가 지닌 예언의 은혜 역시 뛰어났고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수도회는 1474년 교황 식스토 4(Sixtus IV)로부터 승인을 받았는데, 이때 이 수도회의 이름은 아시시(Assisi)'성 프란치스코의 은수자회'였다. 그 뒤 교황 알렉산데르 6(Alexander VI)로부터 수도회의 설립을 허가받으면서 그 이름을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로 변경하였다.

그의 명성이 죽어가는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의 귀에까지 전해져서 왕이 그를 보기를 원하자 교황은 그가 프랑스로 가도록 명하였다. 왕은 성 프란치스코만이 자신을 치료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록 치유되지는 못하였지만 큰 위로를 받고 만족했으며, 이 때문에 루이의 아들인 샤를 8세가 성 프란치스코의 친구가 되어 프랑스 내의 여러 곳에 수도원을 지어주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생애의 후반기 25년을 프랑스의 플레시(Plessis) 수도원에서 지냈는데, 마지막 3개월 동안은 투르(Tours)에서 고독하게 지내면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그는 파스카 목요일에 회원들에게 사랑의 실천과 엄격한 생활을 당부한 후, 다음날 총장 대리를 선출하고 영성체를 한 다음 요한복음 수난기를 들으면서 150742일 조용히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그가 설립한 수도회의 여러 수도원들에 나뉘어 묻혔으며, 151951일 교황 레오 10(Leo X)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943327일 교황 비오 12(Pius XII)에 의해 해상 여행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는 그의 많은 기적들이 바다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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