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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천주교, 가톨릭 세례명, 축일] 성 빈첸시오 페레리오 사제 -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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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빈첸시오 페레리오(Vincentius Ferrerius)

출처 : 가톨릭 굿뉴스

 

성 빈첸시오 페레리오(Vincentius Ferrerius)

출처 : 가톨릭 굿뉴스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 태생인 성  빈첸시오 페레리오(Vincentius Ferrerius)는 귀족인 빌리암 페레리오와 콘스탄스 미구엘의 아들로 태어났고, 1367년에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바르셀로나(Barcelona)로 갔으며, 불과 20세의 나이로 레리다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특히 그의 설교가 뛰어났는데, 유대인과 모슬렘 사이에서도 좋은 평판을 들었다. 

1378년부터 서방교회를 진동시킨 교황 논쟁에서 성 빈첸시오는 아비뇽(Avignon)으로 가서 루나의 베드로(베네딕토 13세) 추기경을 적극 지원하고 그의 고문 겸 고해신부가 되었다. 1399년 성 빈첸시오는 아비뇽을 떠나 10여 년 동안이나 프랑스, 에스파냐 등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큰 감명을 받았고 개종자의 무리가 마치 군대의 행진처럼 무리지어 나왔다고 한다. 

이즈음에 그는 성 도미니코(Dominicus)와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를 대동하신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것은 자신이 더욱 설교에 열심하라는 뜻이라고 해석하였다. 그의 개종자 가운데에는 시에나(Siena)의 베르나디네와 사보이아(Savoia)의 복녀 마르가리타(Margarita, 11월 23일)가 매우 유명하다. 

그는 그 나라말을 모르는 지역에서도 설교하여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말씀의 은혜’를 받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또 이에 따르는 수많은 기적들 때문에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란 별명도 얻었다. 1416년 그는 아라곤(Aragun)의 페르디난도 왕처럼 ‘베네딕토 13세’(Benedictus XIII)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교황 논쟁의 종지부를 찍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 빈첸시오는 사망하기 3년 전부터 프랑스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설교하던 중 브르타뉴(Bretagne)의 반(Vannes)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455년에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심판의 천사라고 불린 도미니코수도회의 설교가로 축일은 45일이다.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교회에 자신을 봉헌하기로 결심하였다. 1367년에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있는 도미니코수도회에 입회하여 이듬해 서원한 후 타라고나에서 2년 동안 공부하였다. 1379년에 툴루즈에서 공부를 마치고 바르셀로나에서 루나 베드로 추기경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을 받은 즉시 그의 고향 발렌시아 수도원의 부원장으로 선임되었고, 1384년부터 발렌시아의 주교좌 성당 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며, 1389년에는 신학 교수가 되었다.

13471350년에 발생한 흑사병으로 인한 혼란이 교황 그레고리오 11(재위 13701378)가 사망한 후 일어난 서방 교회의 분열로 더욱 가중되었다. 빈첸시오는 아비뇽에 거주하던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재위 13781394)를 지지하여 로마의 교황 우르바노 6(재위 13781389)의 선출이 무효라고 확신하였고, 13901394년에는 루나 베드로 추기경을 보좌하면서 클레멘스 7세에게 충성하도록 성직자와 왕들과 국민을 설득하였다. 1394년에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하고 루나 베드로 추기경이 베네딕토 13(재위 13941423)라는 이름으로 아비뇽의 교황이 되었으며, 빈첸시오는 친분 관계를 갖고 있던 새 교황을 지지하도록 프랑스의 왕실을 설득하였다.

그는 분열된 교회의 상황을 종식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그래서 베네딕토 13세가 로마의 교황과 함께 교황직을 사임하고 후계자를 선출함으로써 교회의 분리를 끝내는 협정을 체결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베네딕토 13세가 이를 거절하자 빈첸시오는 그가 교회 분열을 지속시키려 한다고 판단하고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 빈첸시오는 139911월에 아비뇽을 떠나 그 후 20여 년 동안 설교활동을 하였다.

빈첸시오는 순회 설교와 활동 중에도 분열된 교회의 상황을 잊지 않았다. 교회 일치를 위해 베네딕토 13세의 사임을 설득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설교를 통하여 베네딕토 13세를 탄핵하였다. 그 후 베네딕토 13세는 신임을 잃어 요새화된 페니스콜라섬으로 피신하였으며, 이로써 교회 일치의 길도 열리게 되었다. 1419년 프랑스의 반에서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백년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설교를 하던 중 사망하였다. 1458년에 교황 비오 2세(재위 1458∼1464)에 의해 시성이 선언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빈첸시오 페레리오 [Saint Vincent Ferrer]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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