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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천주교, 가톨릭 세례명 축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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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http://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0/00/FNeri.gif)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Firenze) 태생인 성 필립보 네리(Philippus Nerius)는 산마르코(San Marco)의 도미니코 회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에 그는 산제르마노(San Germano)로 가서 사업 경력을 쌓으려고 노력했으나, 자신의 뜻과는 달리 신비체험을 하게 되면서 수도생활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3년에 로마(Roma)로 갔으며, 그곳에서 어느 부유한 고향 사람의 두 아들을 가르치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사피엔차(Sapienza)와 산타고스티노(Sant'Agostino)에서 철학과 신학을 3년 동안 공부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길거리나 시장바닥에서 로마인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신앙생활이 극히 미온적이었던 로마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1548년 성 필립보 네리는 자기의 고해신부인 페르시아노 로사(Persiano Rossa) 신부와 함께 '삼위일체 형제회'를 설립했는데, 이 수도회는 어려운 처지의 순례자들을 사목하기 위하여 평신도들로 구성되었으며 '40시간' 신심을 전파하였다. 그는 1551년에 사제로 서품되자마자 고해신부로 명성을 날렸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집단을 이루어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San Girolamo della Carita)로 몰려왔다. 이곳은 그가 생활하고 있던 사제들의 공동체였다. 그는 수많은 개종자를 얻는 일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도와줄 사제들을 확보하는 일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신자들을 그들의 오라토리오(Oratorio, 방)에 모아놓고 영적 권고와 고해성사를 주곤 하였기 때문에 '오라토리언'(Oratorians)이란 이름으로도 알려졌지만, 실제로 '오라토리오회'가 설립된 연대는 1564년이다. 이때 필립보 네리는 산조반니(San Giovanni) 성당의 주임신부였고, 다섯 명의 제자들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회는 1575년에 공식 승인을 받았는데 이때는 그가 이미 로마(Rome)의 명사로 알려진 때였다. 성 그레고리오 13세(Gregorius XIII) 교황은 그에게 발리첼라(Vallicella)의 산타 마리아(Santa Maria) 성당을 하사했는데, 그는 옛 성당을 철거한 후 그 자리에 '키에사 누오바'(Chiesa Nuova)를 짓고 오라토리오회의 본원으로 사용하였다.
이즈음에 그는 '로마의 사도'로 알려졌고, 교황과 추기경 심지어는 권력자들과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영적 지혜와 환시를 통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힘없는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었다. 특히 그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탈혼과 환시를 수차 경험하였고, 기적까지 행하였으며,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1593년에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장상직을 사임하였다. 1595년 5월 25일 불편한 몸으로 고해성사를 주고 방문자들을 맞은 그는 그날 밤 상태가 악화되어 주위에 모인 영적 아들들에게 십자가를 그어 축복한 후 선종하였다. 그는 1615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성 필립보 네리

(라틴어: Sanctus Philippus Neri, 이탈리아어: San Filippo Neri 1515722- 1595525)는 이탈리아 가톨릭교회의 재속 사제로 오라토리오회의 창설자이다. 흔히 로마의 사도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필립보 네리는 피렌체 태생으로 공증인이자 귀족이었던 프란체스코와 그의 아내 루크레치아 다 모스치아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필립보 네리는 어렸을 때부터 검소하게 자랐으며 산마르코 도미니코회 수도원의 수사들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 필립보 네리는 부유한 숙부 로몰로의 사업을 돕기 위해 그가 사는 마을인 산제르마노로 갔다. 또한 숙부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장차 숙부의 재산을 물려받으리라는 희망도 갖고 있었다. 필립보 네리는 숙부의 신임과 애정을 받았지만, 나중에 마을 인근에 있는 베네딕토회의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그곳 수사들의 가난의 삶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이후 필립보 네리는 성경의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묵상했다고 한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필립보 네리는 결국 평생 동안 보장된 부유한 삶을 포기하고 1533년에 로마로 훌쩍 떠났다.

로마에 당도한 필립보 네리는 갈레오토 카치아라는 피렌체 귀족의 가정교사로 초빙되어 한동안 그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2년 후에 그는 아우구스티노회원들의 지도에 따라 3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어서 그는 소외된 사람들, 즉 로마 길거리의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 매춘부들 속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나중에 사람들에게 로마의 사도라고 불리게 된다. 1538년부터 필립보 네리는 본격적인 전교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그는 도시 전체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였으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1548년 필립보 네리는 자기의 고해신부인 페르시아노 로사와 함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형제회’(Santissima Trinita de' Pellegrini e de' Convalescenti)를 설립하였는데,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형제회의 주요 목적은 특히 로마를 방문하는 수천 명의 가난한 순례자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었으며, 또한 병원에서 치료받고 퇴원하기는 했지만 아직 건강을 다 추스르지 못하여 일할 방도가 없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또 모금 운동도 전개하였다.

1551년에 필립보 네리는 주위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늦은 나이에 부제 서품을 받았으며, 1555523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그는 장차 인도에 가서 선교사로서 활동할 생각이었지만, 로마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을 하고 단념하게 되었다. 1556년 필립보 네리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 병원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 오라토리오회라는 작은 기도 모임을 시범적으로 만들어 운영해나가기 시작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라토리오를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대규모 악곡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 오라토리오의 기원은 바로 필립보 네리가 창설한 오라토리오회에 있다. 오라토리오라는 용어는 본래 수도원 혹은 신학교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경당을 의미했다. 그런데 필립보가 이 경당에서 동료 사제들과 영적 모임을 갖고 고해성사를 베풀었고, 모임 명칭도 자연스레 오라토리오회가 됐다. 이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이 모임을 공식 승인했고, 이후 오라토리오가 음악용어로 정착됐다. 오라토리오 모임에서 성경을 감동적으로 느끼기 위해 신비극을 공연하고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후 오라토리오는 하이든, 비발디, 모차르트에 의해 크게 발전한다.

필립보의 오라토리오회는 처음에는 작게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제들이 참여가 크게 늘기 시작한다. 오라토리오회는 엄격한 생활규율과 청빈을 요구하지 않았다. 별도의 서원도 필요 없었다. 재산 포기와 청빈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라토리오회는 그저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행복한 사제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줄 뿐이었다. 회원들은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를 하는 한편, 영성 서적과 성인전을 탐독했다. 그리고 묵상을 나눴다. 그 열매는 소외된 이웃을 위한 헌신, 복음 선포에 대한 열정, 신비 체험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났다. 사제가 쇄신되면서 교회도 쇄신되기 시작했다. 오라토리오회를 통해 로마는 쇄신되고 있었다.

필립보 네리는 1595526일 고해소에서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베푸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 후, 하루가 끝날 무렵에 선종하였다. 자정 무렵에 객혈하기 시작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 다음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축복을 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입속으로 어떤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선종하였다. 로마의 모든 이들은 성인께서 돌아가셨다. 위대한 성인께서 돌아가셨다.”라고 말하면서 필립보 네리를 크게 애도하였다.

필립보 네리는 1615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필립보 네리의 축일은 그의 선종일인 526일로 지정되었다. 성 필립보 네리의 유해는 누오바 성당에 안장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D%95%84%EB%A6%BD%EB%B3%B4_%EB%84%A4%EB%A6%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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