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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천주교, 가톨릭 세례명 축일] 성 베드로 샤넬 사제 순교자 -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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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샤넬(Petrus Chanel)

출처 : 가톨릭 굿뉴스

 

 

성 베드로 샤넬(Petrus Chanel)

출처 : 가톨릭 굿뉴스

 

 

프랑스 벨리(Belley) 근교 퀴에(Cuet)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출생한 성 베드로 샤넬(Petrus Chanel)은 어린 시절을 목동으로 지내다가 16세 때 멕시미외(Meximieux)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부르(Bourg) 대신학교에 들어가 1827년 7월 1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1년 뒤 제네바 근처에 있는 암베리외(Amberieux) 대목구로 파견되어 여건이 불충분한 본당에서 3년 동안 본당신부로 있었으며, 1831년 콜랭(J.-C.M. Colin)이 외방선교를 위해 리옹(Lyon)에 설립한 마리아 선교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며, 그 후 5년 동안 벨리 신학교의 교수로 봉직하였다.
1836년 그는 남태평양의 뉴헤브리디스(New Hebrides)의 선교사로 파견되어 타이티 서쪽에 위치한 푸투나 섬에서 약간의 성공을 거두긴 하였으나, 추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아들에게 세례를 주려다가 주민들로부터 살해당하였다. 샤넬은 1889년 11월 17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54년 6월 12일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는 마리아 선교 수도회의 첫 순교자이자 오세아니아의 첫번째 순교자로서 오세아니아의 수호성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성 베드로 샤넬(1803~1841). 프랑스인 Oceania 선교사.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새로 창설된 Marists 사제회에 입회(1831), Marists가 서 오세아니아의 감목구(vicariatus)를 맡아 폼팔리에르 주교를 감목 대리(provicarius)로 하여 7인의 회원 사제들이 오세아니아로 떠날 때 샤넬도 함께 떠났다(1836). 주교는 뉴질랜드에 본부를 정하기로 하고, 뉴질랜드에서 2,400km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 바탈리온 신부와 수사 한 사람을 왈리스 섬에 남겨 놓고 샤넬니지에르 수사는 인근 푸누나 섬에 남겨 놓았다(1837). 폼팔리에르 주교는 그들에게 6개월 후에 오라고 일렀지만 환경이 허락지 않아 5년 후에야 돌아갔다.

샤넬은 미지의 언어 때문에 고생 고생하면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본토 족장들에게 목숨을 의지하여 살았다. 그리고 고래잡이 어선들과 무역상들 그리고 호전적인 토인 부족들과 어울리는 데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거듭되는 실패와 궁핍한 생활, 끝내는 족장의 노골적인 박해를 그의 차분하고 상냥한 성격으로 견디어 냈고, 깊은 신앙심과 인내, 용기를 가지고 온갖 난관을 견디었다.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있을 때, 본토 괴한들이 쳐들어와 곤봉 세례를 퍼부어 샤넬l은 맞아 죽었다. 오세아니아에서의 첫 순교자였다. 1889년 섬 전체가 가톨릭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샤넬은 1889년 시복(), 1954년 6월 12일 시성()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성 베드로 샤넬(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2007. 11. 25., 가톨릭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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