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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천주교, 가톨릭 세례명 축일]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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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와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Aloysius Gonzaga)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 또는 로베르투스)는 1542년 10월 4일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몬테풀차노에서 태어나 1560년 10월 예수회에 입회하여 1570년 3월 25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당시 교회는 종교 개혁자들에 대항하느라 교부학과 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경시되던 상태였다. 토스카나 지역의 유망한 젊은 학자로서 그는 종교 개혁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교리를 체계화하고 성서를 연구하는 두 가지 일에 그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루뱅(Louvain)에서 예수회 회원으로는 처음으로 교수가 된 사람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그의 강의록을 바탕으로 세 권으로 된 “이단 반박론”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교황의 세속권과 평신도의 역할에 관한 부분들이다. 그는 ‘왕권신수설은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분노를 초래했으며, 또한 로마 교황의 세속권을 발전시켰다. 비록 그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인 버클레이와 대항하여 교황을 옹호했지만, 교황 식스토 5세(Sixtus V)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벨라르미노는 1599년 ‘학식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추기경이 되었다. 벨라르미노는 바티칸 궁전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이 실천해 오던 내핍생활을 전혀 완화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만을 먹으면서 거의 아주 필수적인 것 이외에는 가계비 지출을 제한했다. 그는 군에서 탈영한 한 군인의 몸값을 치렀고, ‘벽은 감기 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기 방의 커튼을 가난한 사람의 옷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알려진다. 그의 많은 활동 가운데 그는 특히 교황 클레멘스 8세 시대의 신학자로서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두 개의 교리서를 준비했다.
벨라르미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논쟁은 1616년에 일어난 일로 그가 찬양하던 자기 친구 갈릴레이에게 충고를 해야 했던 것이다. 벨라르미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성서에 위배된다고 결정한 신앙교리 성성을 대신하여 충고를 했다. 이 충고는 아직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것을 가설 이상으로 지나치게 비약시키는 데 대한 하나의 본보기였다.
벨라르미노는 1621년 9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성 과정은 1627년에 시작했으나 그의 저서에서 연유된 정치적 이유로 인해 지연되다가, 1923년 5월 13일에 복자품에 올랐으며, 1930년 6월 29일 시성되었다. 1931년에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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