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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천주교, 가톨릭 세례명 축일] 성녀 힐데가르트 -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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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영적 체험을 묘사하는 빙겐의 성녀 힐데가르트

(by Master of Hildegard-Code Illustration from the Rupertsberg Codex of Liber Scivias in 12th century in the Benedictine Abbey of St Heldegard in Eibingen.jpg)

출처 : 가톨릭 굿뉴스

 

성녀 힐데가르트(Hildegardis, 또는 힐데가르데)는 독일 남서부 알자이(Alzey) 부근의 작은 마을인 베르메르스하임(Bermersheim)에서 귀족인 힐데베르트(Hildebert)의 열 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8살 때 병약한 관계로 디지보덴베르크(Disibodenberg)에 있는 성 베네딕토 수녀회에 맡겨져, 슈폰하임(Sponheim)의 메긴하르트(Meginhard) 백작의 동생인 은수자 복녀 유타(Juttta, 12월 22일)의 돌봄을 받으며 읽기와 쓰기, 찬미가 부르기, 자수 작업과 음악 등의 교육을 받았다. 성녀 힐데가르트는 12세 때부터 은수 생활을 시작하였고, 14세 때에 이미 수도 서약을 했다.
1136년 유타 원장이 세상을 떠나자 38세의 성녀 힐데가르트가 수녀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1141년 그녀의 마흔세 번째 생일날,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면서 예언자적 소명을 받았다. 그녀는 처음에 이 체험을 거부하여 내적인 갈등으로 인해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인 고해사제에게 상담을 했고, 마인츠(Mainz) 교구 대주교의 지시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그녀가 체험한 환시가 사실임을 확인한 후 그녀의 환시를 글로 기록하는 일을 돕도록 수도승 폴마르(Volmar)를 임명하였다. 특히 성녀가 살던 시대는 서방 교회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그녀의 예언자적 소명이 더욱 큰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1148년 그녀는 빙겐의 루페르츠베르크(Rupertsberg)에 새로운 수녀원을 설립하고, 1150년 다른 수녀들을 데리고 디지보덴베르크 수도원을 떠나 그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에 첫 번째 저서인 “쉬비아스”(Scivias Domini)를 완성하자 그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연과 치료에 관한 책, “책임 있는 인간”(Liber Vitae Meritorum), “세계와 인간”(Liber Divinorum Operum) 등을 저술하였고, 1165년에는 라인강 건너편 아이빙엔(Eibingen)에 두 번째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환시를 설명하기 위해 독일 전역을 네 차례나 도는 설교 여행을 하였다. 그녀는 1179년 9월 17일 81세의 나이로 선종해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에 묻혔다.
성녀 힐데가르트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여성으로 손꼽히며, 다양한 방면의 연구를 통한 그녀의 저서는 단테(Dante)나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에 견줄만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녀는 공식적으로 시성된 사실은 없다. 그러나 1664년부터 독일 마인츠 교구의 시간 전례(성무일도)와 미사 경본에서 9월 17일을 그녀의 축일로 기념하기 시작했고, 1940년부터 이 축일을 교황청에서도 받아들였다.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는 2012년 5월 10일 교황청 시성성의 시복시성 관련 교령을 승인하면서 성녀 힐데가르트를 성인 목록에 등록해 공식적으로 그녀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7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제13차 세계 주교시노드 개막미사를 집전하면서 아빌라의 성 요한(Joannes, 5월 10일)과 빙겐의 성녀 힐데가르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2021년 1월 25일 교령을 발표해 9월 17일을 빙겐의 성녀 힐데가르트 기념일로 제정하며 보편 전례력에 추가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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