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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천주교, 가톨릭 세례명 축일]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 학자 -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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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성 치릴로(Cyrillus)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15년경 예루살렘에서 로마 제국 황제 가문의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듯한 성 치릴로(Cyrillus)는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으며, 342년 또는 그 후에 성 막시모 2세(Maximus, 5월 5일)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성 치릴로는 수년 동안 예비신자 교육에 전념하다가 350년 또는 351년에 예루살렘의 주교인 성 막시모 2세가 사망하자 그를 승계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대한 교계적인 관할권을 주장하던 카이사레아(Caesarea)의 아리우스파(Arianism) 주교이던 아카키우스(Accacius)와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는 자신의 주교좌에서 해임되고 유배를 당하였다. 또 다른 이유는 성 치릴로가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재산을 매각하여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회 재산을 불법으로 매각했다는 누명을 쓴 성 치릴로는 타르수스(Tarsus)로 갔으나 359년 셀레우키아(Seleukeia) 주교회의에 의해 복직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재차 아카키우스의 음모에 의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축출되었다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다시 복직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성 치릴로는 367년에 세 번째로 유배되었으나, 발렌스 황제가 율리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에 유배된 모든 종교인들을 사면함으로써 석방되어 다시 주교좌로 돌아왔다.

또 다음 해에는 안티오키아(Antiochia) 공의회가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오(Gregorius, 3월 9일)를 팔레스티나(Palestina)로 파견하여 그가 역설하던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로 인한 잡음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 용어는 니케아(Nicaea) 신경의 기본 용어이다. 성 그레고리오는 '예루살렘 주교좌는 파벌주의와 아리우스주의로 뒤엉켜 있고 또 윤리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성 치릴로의 신앙과 그 주교좌는 올바르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후 성 치릴로와 성 그레고리오는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서 성 치릴로는 니케아 공의회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주교로 인정받았다.

사실 성 치릴로는 성서학자이자 뛰어난 설교가였다. 그의 작품 중에서 24편의 강론으로 구성된 “예비자 교리”(Catecheses)가 가장 유명한데,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36년 예루살렘에 완공한 성묘 성당(Church of the Holy Sepulcher)에서 348년 사순과 부활시기에 한 강론으로 예비신자와 새 영세자들의 신앙과 생활을 위한 명쾌한 지침서이자 교리 해설서이다. 또한 전례적으로도 4세기의 팔레스티나 전례를 자세히 보여주는 소중한 문헌이다. 역사가인 소크라테스와 소조멘은 성 치릴로는 철저한 아리우스주의 반대자였고, 그의 정통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387년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난 그는 교황 비오 10세(Pius X, 1903-1914년 재위)에 의해(또는 1882/3년에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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