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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전례력의 축일과 성인들

[천주교, 가톨릭 세례명 축일] 성 안셀모 주교 학자 -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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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9/Anselm_of_Canterbury.jpg)

 

1033년 겨울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Aosta)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안셀모(Anselmus)는 15살 되던 해에 수도원에 입회하려 하였으나 부친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1056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Bourgogne)로 공부하러 집을 떠났고, 1059년에는 노르망디(Normandie)의 베크(Bec)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수도원 원장은 란프랑코(Lanfrancus)로 안셀모는 그의 제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1060년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정식으로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1067년에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된 성 안셀모는 제자인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서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고, 윤리 교육과 종교 교육에 힘씀으로써 베크 수도원 학교를 명문 학교로 발전시켰다. 1078년에 수도원 원장이 된 그는 박학다식과 성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수많은 청년들이 베크 수도원으로 몰려들자 그들을 한 곳에서 교육할 수 없어 프랑스와 영국 여러 곳에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이를 통해 프랑스의 경계를 넘어 영국에까지 명성을 떨친 성 안셀모는 란프랑코가 사망한 뒤 영국 왕 윌리엄 2세(William II Rufus)에 의해 1093년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성 안셀모는 이때부터 적지 않은 분쟁에 휩싸였다. 영국 국왕의 교회 직무에 대한 간섭에 반발하고 교황의 권위를 위해 투쟁하며 성직자들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국왕은 물론 다른 많은 주교들로부터도 배척을 받게 되었다. 안셀모는 1093년까지 베크를 떠나지 않고 국왕 윌리엄 2세와 격렬한 논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결국 1097년 영국을 떠나 로마로 망명을 갔다.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Urbanus II, 7월 29일) 역시 윌리엄의 요구를 반대하자, 윌리엄은 안셀모를 유배시키겠다고 위협하였으나 끝내는 안셀모의 귀국을 허용하였다. 1098년 우르바노 2세 교황의 요청에 따라 성 안셀모는 바리(Bari)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성령을 두고 벌인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필리오퀘'(filioque) 논쟁을 조정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1100년에 윌리엄 2세 국왕이 사망하자 안셀모는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또 다시 윌리엄의 후계자인 헨리 1세에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아 1103년에 다시 로마로 망명길에 올랐다. 1102년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공의회에서 안셀모는 노예 매매를 극렬히 비난하였다.

그는 영국 국왕을 상대로 하여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바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 그 당시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스콜라 학파의 아버지'란 칭호를 이미 얻고 있었다. 그는 계시와 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아리스토텔리스파의 변증법에서 이용하는 이성주의를 신학에 성공적으로 도입시킨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간의 개념에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한 “독어록”(獨語錄, Monologion)의 저자이다. 이 사상은 후대의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데카르트(Descartes) 그리고 헤겔(Hegel)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성 안셀모의 “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는 중세의 강생에 관한 신학 논문 중에서는 가장 돋보이는 대작이다. 그의 저서 중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De fide Trinitatis), “동정녀 잉태론”(De Conceptu Virginali), “진리론”(De Veritate) 그리고 400여 통의 편지와 기도 및 묵상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다. 그는 1109년 4월 21일 캔터베리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492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Alexander IV)에 의해 시성되었고, 1720년에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단테는 신곡의 천국 편에서 태양권 안에 있는 빛과 힘의 영들 가운데 안셀모를 언급할 정도였다. 성 안셀모의 상징은 배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캔터베리의 안셀모(이탈리아어:Anselmo d'Aosta, 라틴어: Anselmus Cantuariensis, Anselm of Canterbury, 1033/1034~ 1109421)는 이탈리아의 그리스도교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1093~1109년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냈다. 스콜라 철학의 창시자로서, 신 존재를 대상으로 한 존재론적 신 논증 제시와 십자군에 공개로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셀모는 1494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축일은 421일이며, 로마 가톨릭교회와 일부 개신교(성공회, 루터교)에서 이 날을 기념한다. 1720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안셀모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1033년 혹 1034년에 부르고뉴 왕국의 아오스타(현재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주)에서 귀족 가문인 아버지 곤돌포(Gondulfo)와 어머니 에르멘베르가(Ermenberga)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27세에 그는 베크 수도원에서 수사가 되었다.

안셀모의 일생은 신학자였던 베크 대수도원 시대와, 정치·종교 간의 대립이 심한 환경에서도 교회의 자유와 권리를 배려해서 헌신한 캔터베리 시대로 나뉜다. 안셀모는 초기에 '이해하기 위하여 나는 믿는다'는 태도에서 <모놀로기움(모놀로그)>, 신의 존재 증명으로 유명한 <프로슬로기움><진리론>을 저술하고 후에는 속죄론으로 유명한 <쿠르 데우스 호모(왜 신은 사람이 되었는가)>를 저술했다.

안셀모는 초기 스콜라 철학자로서 신앙을 전제하고 이성을 추구(fides quaerens intellectum)한 점에서는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를 스콜라스럽게 계승하였다.

안셀모는 저서 프로슬로기온(라틴어: Proslogion)에서 다음과 같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대전제: 신은 그 이상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존재이다.

소전제: 그러나 이 이상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은 정신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론: 그러므로 신은 정신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한다.

출처 :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BA%94%ED%84%B0%EB%B2%A0%EB%A6%AC%EC%9D%98_%EC%95%88%EC%85%80%EB%AA%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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