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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오늘 묵상 이야기

위령성월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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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이런 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

"하느님, 제가 큰 죄를 지어 하늘나라에 못 들어갈 것 같으면 

죄를 짓기 전에 빨리 죽음에 이르게 하소서."

또한 

"서른까지만 살게 해 주세요. 

그 시간동안 열심히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했지요.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을 때

저보다 150년 전에 태어나 15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성인이 된 성 도미니코 사비오께서 저와 비슷한 기도를 

저보다 더 어린 시절에 바쳤다라는 기록을 

성인전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성 도미니코 사비오와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만

한가지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또한 매달 피정 때마다 "착한 죽음 연습"을 통해서 

죽음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죽음을 준비합니다.

내일 내가 눈을 뜨지 않았을 때를 준비하며

내 방과 옷징과 책상과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정리합니다.

공식적으로는 매달 한 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종종 했습니다.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까지는 제가 큰 죄를 짓지 않았나 봅니다.^^

정확히 서른에 수도원에서 나왔으니 

하느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시기는 하셨군요.

늘 하느님의 방식이라니까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이 세상의 삶이 덧없어 보인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알파요 오메가이며 시작이며 마침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미완성인 저희를 

완성의 상태로 만드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나라라는 완성의 상태를 목표점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완성의 하늘나라를 

현재 살고 있는 것이며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철학시간에 배운 이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죽은 이에게는 죽음이 없다."

단지 눈을 감을 뿐이지요. 그리고는 깨어나지 않습니다. 영원히...

그렇기 때문에 죽은 이는 죽음을 모릅니다.

내가 죽어서는 현실적으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형제가 죽었을 때, 다른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음을 경험합니다.

이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합니다. 웁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죽음의 체험입니다.

정말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고 죽음의 신비를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위령성월, 위령의 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먼저 돌아가신 조상, 부모, 형제, 친척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죽음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고, 저 멀리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삶이 늘 내 곁에 있듯이 죽음 역시 내 곁에 있는 것입니다.

삶의 그림자가 죽음이 아닐까요?

삶만 좇는 나를 내려놓고 그 그림자를 바라보며 나의 선종을 위해서 기도해 봅니다.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마음 깊이 새겨봅니다.

그리고 죽음 너머에 있는 하느님이 계신 하늘 나라를 그려봅니다.

이 세상에서는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뵐 수 없고

간접적으로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지만

죽음이라는 잠깐의 순간을 지나

완전한 하느님과 완전한 내가 만나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뵙게 될 날을 기다립니다.

 

20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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